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 인가?
내가 가는 길은 어떤 길 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과 악을 고민하기도 하고, 인생이 무엇인가 고민하기도 한다. 내가 어디서 왔고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해답은 찾을 수 없고 새로운 의문만 생겨날 뿐이다.
과연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이며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주인공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나의 의지에 따라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있다.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양자역학적 관점에서의 나
만일 본질을 알면 모든 관점과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적 이론이다. 하지만 간략히 말하면 양저역학은 물질속의원자나 전자와 같은 매우 작은 입자들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원자는 모든 것에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원자로 되어 있고 우리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둘의 간격은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우주가 그런 것 처럼 원자의 내부도 역시 그렇다. 양자역학의 핵심은이 입자들이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대한 것이다. 파동이기도 하면서 입자이기도 한 이중성을 띤 양자들은 관측전과 후에 파동에서 입자로 입자에서 파동으로 바뀌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래서 정의 할 수 없다. 우리가 인생과 나 자신을 정의 할 수 없는 것과 비교 할 수 있다.
우리는 빛을 통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빛이 관측 대상을 부딪힌 후 반사되어야 우리 눈에 그 사물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파동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 그것은 입자화된다. 양자역학의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 셰계를 설명 할 개념과 경험이 없고 이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인간에게는 없다.
하지만 우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주적으로 보면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본질이지만, 단지 인간이 이해하려고 애쓰며 왜 그럴까에 대한 의문이 계속 생기게 되는 것 뿐이다. 즉 인간이 빛을 통해 파동을 입자로 바꾸는 것은 우주적으로 볼 때 왜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그저 그런 것이다.
무한한 우주에서 인간의 작은 움직임 하나는 이유가 없는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세상에서도 나 역시 빛과 같이 다중성을 지닌 세상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겸손함을 가져야 하는 것이 세상의 섭리일 것이다.
종교는 초월적인 존재나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신앙공동체를 말한다. 우주적인 절대적 진리의 추구와 신에 대한 숭배를함으로써 인간이 겪는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의미와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해 있다.
종교가 영성을 포함한다고 해서 영성이 모두 종교를 뜻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지만 영적 성장을 전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듯이 무엇은 좋고 무엇은 나쁘다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크리스트교적 관점에서 의 나
크리스트교에서 하나님은 천지와 인류를 창조하신 창조주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는 모든 만물의 근원이다. 종교적 예배와 믿음 그리고 감사 사랑의 봉사 행위를 통해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나눈다.
하나님은 모두를 창조하신 아버지시며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이기에 사랑으로 봉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잉태된 자식들이며 어느 한 사람에게만 고통을 주는 법이 없이 공평하게 사랑으로 보살피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 진실된 마음인 것이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자는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깨달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즉 인간의 내면에는 창조주의 힘이 있고 절대적인 존엄성과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바로 소우주이며 소 창조주인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의 나
불교는 절대적으로 경배하고 숭배해야 할 특정한 신이 없다. 석가모니 또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경전상에 나오는 부처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는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자가 부처라는 것이다. 우주만물은 공이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우주적인 인식론의 출발이 인간의 감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불교는 연기설을 바탕으로 자비를 베풀 것을 핵심으로 한다. 연기설이란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무수한 인연에 의해서 생성하고 소멸된다는 진리를 말한다. 자비란 생멸의 과정에서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과 더불어 기뻐하고 슬퍼하는 불교적 사랑을 의미한다.
자기 안의 해제된 부처의 참 성품을 직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의 이상 중 하나 이다. 즉 어리석음을 해탈하여 내 안에 부처가 있음을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나의 삶인 것이다.
유교 사상적 관점에서 의 나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공자의 유교사상의 특징 중 하나는 인본주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인간의 내면에는 하늘의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공자는 살아있을 때의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은 뒤에 삶을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말하며 현재를 살 것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남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즉 남을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나와 같이 동등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은 무궁무진한 선이며 가장 큰 잠재능력이라 했다. 따라서 나의 내부에도 본성적으로 인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나의 삶은 그 인을 실현하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도가 사상적 관점에서 의 나
노자는 도가사상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본래 순수하고 자연의 덕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사물의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게 되었고, 의외로부터 시작된 사물의 겉모습에 이끌려 진실된 본질의 가치를 바라보지 못한다고 하였다.
노자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고 자연히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때야 비로소 어떠한 고통이나 혼란 없이 초연한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곧 우주며 우주가 곧 나였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상선약수는 인간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나 자신을 배열한 것이 곧 세계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관점과 삶의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배열하는 주체는 물론 나 자신이고, 내가 배열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배열하는지에 따라 세셰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명상적 관점에서 의 나
명상은 생각을 비우는 것을 말한다. 명상이라는 말 자체가 생각에 눈을 감는다라는 의미를 가졌다. 실제 눈을 뜨고 하던 감고 하던간에, 생각이 눈을 감는 것이 명상이다. 내가 의미를 부여한 것을 내려놓고 자연 그대로를 느끼고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의도와 주관적 판단 없이 그저 느낌으로 내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명상이다. 자연의 풍경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고 유쾌한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분신 현상이다. 자연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는 자는 위대한 본질을 만나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본선과 우주가 일체가 될 때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
우리는 보이는 것에 연연하고 살지만 실제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이 창조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부처가 있고 우주가 있으며 창조의 힘이 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상들의 의미를 부여하고 주관적 판단을 넣었기 때문이다.
세상 살이가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들다는 감정을 부여하고 내 인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자연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생각하지만 내가 안 좋은 감정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족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나를 불행 속에 집어넣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어떠한 사물도 현상도 세상도 주변의 사람들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고 내 앞길을 막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내가 부여한 의미이고 내가 주관적으로 판단한 결과물이다. 내가 힘들다고 하는 그 생각과 느낌은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거기에 주관적 힘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 뿐이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의 실제는 세상에 없다.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내려놓고 보면 그 존재 자체가 보인다. 자연을 꺾고 자연을 느끼고 자연에서 나를 만나보자. 놓아 보자. 힘을 빼고 살자.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초연한 관찰자가 되라는 말들의 의미가 그 뜻이다.
육체의 힘을 빼면 정신이 느껴진다. 우리는 육체의 밑빠진 잠자리에서 얼마나 다양한 꿈을 꾸고 많은 경험을 하고 있는가? 없다 있다 라는 것은 내 주관이다. 되고 안되고는 내 주관이다.
옳고 그름도 내 주관이다. 내 주관은 틀릴 수도 옳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내면의 나인 것이다. 내가 스승이고 내가 제자이다. 내가 우주고 내가 부처다. 창조의 힘이 나이고 내가 원자이고 내가 에너지다. 내가 지혜이며 내가 과학이고 내가 철학이다.
절대 하찮게 대할 수 없는 우주적 위대한 존재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게 될 수 있고 위대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불평만 하면서 살 수도 있고 내가 실제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끌어당길 수도 있다.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관계가 달라진다.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가? 내가 내딛는 방향대로 길은 이어진다.
길을 막는 건 내 자신일뿐 외부적 방에는 없다. 내가 보는 것이 곧 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모르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글을 마치며…
삶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항상 기쁨과 고통이 함께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 중에서 서로 사랑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는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삶을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힘들고 고달픈 면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힘내서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셍각한다.